최근엔 계속 프리미엄 막걸리와 소위 '힙걸리' - 내가 만든 말로써, 힙함을 추구하는 요새 막걸리를 칭하는 말- 만을 계속 마셨다. 아무래도 새로운 막걸리를 계속 찾다보니, 아무래도 그런 막걸리들에 좀 더 손이 간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막걸리의 근본은 어떤 의미에서는 싼 가성비 막걸리에 있다는 것이 아직도 변하지 않는 생각이다. 물론 나도 안다. 전내기를 비롯하여 여러 이양주, 삼양주, 혹은 그 이상 빚어낸 프리미엄 막걸리가 추구하는 고급스러운 막걸리가 사실 우리 술 막걸리의 근본이라는 것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건 '탁주의 근본'이고, 실제로는 우리가 70년대 말 이후 익숙해져 온 한 병에 2000원 이하의 가성비 막걸리들 또한 마치 초록색 병의 희석 소주처럼, 우리 음주 생활에 매우 깊게 스며들어 있고, 특히 서울 장수 막걸리가 시장을 평정한 이후, 실제 우리에게 있어 '막걸리'를 떠올리면 바로 이러한 아스파탐이 들어간 싸고 독특한 맛을 내는 가성비 막걸리가 떠오르는 것이 사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2022.03.28 - [수렵채집일기/무슨 책이 도움이 되는가] - 막걸리를 탐하다 - 이종호
간만에 충청도 지역을 방문해서 한 지역 농협 매장에 들러 오랜만에 지역 특산 막걸리를 구해 마셔보았다. 첫 잔에서 부터 다가오는 익숙하고 또 색다른 막걸리 맛에 뭔가 향수(郷愁)를 느겼다. 향수(郷愁)라고 하니, 국어 교과서에 실린 시인인 정지용 시인의 시가 떠오른다. 오랜만이니 한 번 인용하고 가자.
향수(郷愁)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석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1927년>
이 시는 잘 알려진 것처럼 시인 정지용이 일본에서 유학 생활을 할 때 고향을 그리워하며 쓴 시이다. 현재 (2024.1.기준) 고등학교 1학년 교과서에도 등재되어 있으며 우리말의 풍부한 구사, 다양한 감각적 이미지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나타낸다. 나는 그런데 이 시를 읽으면서 미국이나 유럽, 일본 등지에서 화려한 외국 술을 마시고 있을 때 문득 생각나는 가성비 막걸리를 떠올리는 나를 투영해 보곤 한다. 뭔가 초라하고 보잘 것 없어도, 고향이란 늘 그런 존재가 아닐까 싶다.
이번에 마신 '새마을 생막걸리'는 영탁막걸리로 유명해 진 예천양조에서 나온 가성비 막걸리다. 예천양조의 술은 전에도 몇 번 접한 적이 있다.
2022.09.05 - [Useful Things/술 추천] - 술 추천: 영탁 생 막걸리
2023.01.21 - [Useful Things/술 추천] - 술 추천: 백주도가 유산균 막걸리 (예천양조)
이 예천양조 또한 지방 양조장이지만, 충분히 지평 막걸리나 서울 장수막걸리처럼 전국구로 발전 할 수 있는 포텐셜을 갖춘 곳이라고 예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마신 새마을 생막걸리로 이런 생각이 더욱 굳어지게 되었다.
새마을 생막걸리는 이번에 마신 '새마을운동' 컨셉의 라벨과 함께 유명 가수 김흥국씨를 모델로 쓴 모델 두 종류가 있다.
맛은 정말 좋다. 시원하고 드라이한 막걸리여서 그렇게 달지 않은 것이 큰 장점이다. 아스파탐과 아세설팜칼륨과 같은 인공감미료 외에 물엿도 들어가 있지만, 달콤함보다, 고소함과 달큰함이 두드러진다. 역시 충남지역의 술이라는 생각이 든다. 전반적으로 영탁 막걸리와 비슷한 맛이라는 생각도 든다. 이 술을 같이 마신 사람이, "어, 이거 장수 막걸리 같은데?" 라는 코멘트를 하였는데, 나는 이 술이 장수 막걸리와는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 사람이 말한 것은 의미심장하다고 생각한다. 즉, 전국구에 어필할 만한 가성비 막걸리의 특성 - 적당히 맛있고, 청량하고, 너무 달지 않지만 확실히 달큰하고 고소한 술 -을 잘 갖추었다는 점과, 영탁 막걸리의 마시기 좋고 깔끔한 대중성을 잘 갖추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향 또한 평범하지만 상당히 익숙한 달큰한 막걸리 향이 정말 향기롭게 퍼진다. 향이 강하고 센 것에서 좋은 점수를 주고 싶다. 가성비 막걸리 중에서는 향이 밍밍하고 약한 술이 많은데 이러한 편견을 깨주는 술은 드물기 때문이다. 이렇게 확실한 향이 난다는 것은 술을 만드는 데 쓰는 재료가 충분히 사용되었고 잘 발효되었다는 점을 말해 주는 것 같다. 단순한 향이지만 이렇게 깔끔하고 지속력이 좋은 향에 대해서는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질감은 중간 정도의 타격감 있는 탄산감에, 라이트한 바디를 가졌다. 어떤 의미에서 전형적인 가성비 막걸리이지만, 기본에 충실한 술이라는 점은 바로 이 질감에서도 한번 더 확인할 수 있었다. 예천양조는 여러 의미에서 포텐셜이 느껴지는데, 영탁 생 막걸리의 모멘텀을 살릴 수 있는 메가 히트가 나오지 않는 것 같아 아쉽다.
많은 막걸리들이 단순히 라벨을 이쁘게 만들거나, 독특하게 만들어서 마케팅을 해 보려는 시도를 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시도가 부질없다는 것은 아마 그러한 시도를 해 본 많은 양조장들 자신들이 더욱 잘 알것이다. 경쟁이 치열한 막걸리 시장에서 어떻게 하면 시장에서 살아남고, 나아가 장수 막걸리나 지평 막걸리처럼 전국구로 거듭날 것인가는 경영학적인 관점에서도 매우 재미있는 과제라고 생각한다. 높은 포텐셜을 갖춘 예천양조 역시 이러한 도전과 시도를 포기하지 않고 꼭 좋은 결과를 갖추기를 응원한다.
오랜만에 즐겁게 마신 가성비 막걸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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