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에 있는 우리 술 (전통주) 전문 가게인 '한국술 보틀숍'에 다녀왔다.
생긴지 약 7개월 정도 된 곳이라고 하는데, 홍대에는 후리 전통주를 다루는 보틀숍 (Bottle shop)이 많다. 그 중에서 가장 뭔가 세련되어 보이고, 주인 분의 진심이 통화 시에 목소리로 잘 느껴진 '한국술 보틀숍'을 선택해서 다녀 왔다.
밤 늦게 찾아간 것도 있고 해서 서둘러서 추천 받고, 서둘러 2병 구매해서 나왔는데, 시간만 되면 좀 더 찬찬히 둘러 보고 싶었다. 이전 충무로에 해창막걸리를 사러 갔던 전통주 매장인 '술술상점'도 굉장히 좋았는데, 여기는 좀 더 전문적인 디스플레이와 술 품목이 구비되어있는 듯 하고, 주인 분들 2명 (남자 분 2명이었다)이 옷 스타일도 멋있고 해서 이분들과 친해지고 싶어서라도 다니게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 한국술 보틀샵에서 내가 막걸리를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해 주고, 위스키도 좋아한다고 말씀 드리고, 증류주 하나 막걸리 하나를 추천 받았다.
그렇게 해서 사 온 것이 바로 추사 40 이다.
예산 사과으로 와인을 만들고, 이를 증류한 브랜디 제품이다. 아주 맛있다는 평을 여기 저기에서 들었고, 막걸리를 리뷰하며 알게된 여러 전통주 관련 사이트에서도 언급이 있었기에 망설이지 않고 구매했다. 다만, 한번에 많은 용량을 사 오기에는 좀 부담스러워서, 우선 미니 바틀인 250ml 짜리를 구매했다.
사 오고 나서도 일단은 실온에서 며칠간 보관해 두었다. 당장 흥분한 상태에서 기대감에 들뜬 채 마셔서 리뷰를 그르치고 싶지도 않았고, 이런 전통주 증류주는 실온에서 조금 숙성시키면 좀 더 맛과 향이 선명하게 우러나온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구매 후 약 1주일 정도를 묵힌 후 케이스를 개봉하고 맛을 보았다. 병의 품질이 생각보다 좋아서 깜짝 놀랐다. 유리가 두꺼운 것이 술 품질 유지에 좋은지, 얇은 것이 좋은지 잘 알지는 못하지만, 일단 얇고 세심해 보이는 추사40 병의 느낌은 매우 좋았다. 잘 만든 위스키 잔을 연상시키는 고급스러움이 느껴졌다.
예산은 추사 김정희 선생님이 태어난 고장이기도 하고, 사과가 유명한 곳이라고 한다. 이 곳 예산의 '예산사과와인'에서 직접 재배한 후지 사과를 증류하여 오크 숙성한 사과 증류주가 바로 추가 40이다. 가당하지 않고 발효하였으며, 상압식 동증류기로 두 번 증류하여 오크 숙성사과의 은은한 풍미와 바닐라향 초콜릿 향이 나며 뒤끝이 깨끗한 술이라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이 추사 40이 있는 양조장 '예산사과와인'이다. 40년 동안 충남 예산에서 사과밭을 가꾸어 오신 서정학 대표의 바탕 위에 캐나다에서 와인 양조를 배운 사위 정제민씨의 양조기술이 만나 와인과 브랜디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이 공산품을 생산하는 술 공장이 아니라 사과농원 안에 와이너리를 건축하고 레스토랑과 세미나실, 팬션 스타일의 숙소까지 갖춘 유럽스타일의 농장 와이너리라고 한다. 한 번 꼭 가봐야 겠다고 다짐한다. 현재 이 예산사과외인의 대표는 정제민씨로 되어 있다.
이 양조장에 관심있는 사람은 아래 링크를 확인해 보기 바란다.
이 추사40의 맛은 매우 단정한 편이다. 역시 한국 술이라는 생각이 든다.
알콜 도수가 40도로 낮지 않은 편이고, 또 오크 숙성을 거쳤기에 색깔이나 질감이 상당히 위스키와 비슷할 것 같은데, 이 추사 40에서 위스키 특유의 강한 알콜 맛은 거의 배제되어 있다.
그렇기에 목넘김이 굉장히 부드럽다. 순수함을 아주 높인 느낌이다.
그리고 무언가 개성을 상당히 줄인 느낌이다. 어쩌면 이 지점에서 한국적인 정서를 느낀걸지도 모르겠다. 어떤 리뷰에는 이런 심심함을 이유로 약간 가성비가 떨어진다라는 평이 나오는 것 같고, 사실 스코틀랜드의 위스키나 미국의 버번에 비하면 향과 맛에서 화려함이 떨어지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이 한반도에서 술을 만들어 온 전통에 근거한 전통주임을 고려하였으면 한다. 우리 음식, 우리 일상 문화, 우리 언어를 고려했을 때, 나는 이 술은 우리 일상에 초대되기에 매우 적합한 개성을 가진 술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술 중에 가장 대중적이 되어 버린 시원한 (화학)쏘주, 가벼운 맥주, 그리고 싸고 화학 감미료 맛 달달하고 톡쏘는 막걸리, 이 들 속에서 조금씩 조금씩 존재감을 높여가는 증류식 소주, 다양한 개성을 갖춘 전통 막걸리 이들 모두 관통하는 것은 사실 약간 회색 빛의, 뒤로 물러나 있는 느낌이다. 술 자체를 마시며 즐기는 것이라기보다는 술과 함께 먹는 음식이 있고, 항상 같이 있는 사람, 그 사람과의 대화 속에 슬몃 자리를 내줘야 하는 것이 유교 전통의 조선과, 그 이후 가혹했던 식민지 시대, 산업화 시대, 민주화 시대, IMF 이후 시대를 숨가쁘게 달려온 우리 술의 운명이었던 것 같다.
앞으로는 좀 더 달라질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이런 개성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이전 마셨던 화요 XP 프리미엄의 야심찬 도전이 생각난다.
2021.06.10 - [Useful Things/술 추천] - 술 추천: 화요 X. Premium (화요 XP)
여튼 다시 맛으로 돌아가면, 맑은 물의 질감과 함께 은은한 사과맛과 오크 숙성 특유의 텁텁하고 스모키한 맛이 기분 좋게 지나간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부드럽고 절제된 질감 속에서 아주 조화롭게 지나간다.
향기는 은은한 사과향, 상큼한 다른 과실향, 살짝 밀과 같은 고소한 곡물 냄새도 난다. 참나무 오크향은 맛만큼 선명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감압증류 방식을 이용하면 향이 약해진다고 하는데, 그 영향일 수도 있겠지만, 향은 매우 빨리 휘발되고, 그렇게 강하지 않았다. 이건 내 개인적으로는 큰 약점이라고 생각한다. 맛이 부드러운데 향까지 약하니, 값이 어느 정도 나가는 고급스러운 술임에도 불구하고 맛과 향 모두 인상깊은 한 방이 없다면 이건 좀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화요XP Premium 의 향을 생각해 보면 분명 개선점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팔레트 (Palate), 입 안에서의 감촉은 부드럽고 절제된 알콜의 작열감이 특징적이다. 이 부분은 아까도 길게 언급한 것처럼 꽤 훌륭하게 잡혀있다. 그리고 고급 전통주의 개성인 맑은 물의 느낌 또한 매우 훌륭하다. 이는 위스키, 사케, 와인 어디에서도 찾기 어려운 귀한 특징이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물이 맑고 좋은 국가라는 명성이 있다고 하는데, 그 말이 맞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생수들도 대부분 해외 유명 생수와 비교해도 맛이 그렇게 떨어지지 않는다.
어렸을 때는 일본의 소주 (焼酎、しょうちゅう)를 좋아했다. 고구마나 감자, 보리로 만든 증류 소주의 향과 맛이 취향에 잘 맞았다. 지금도 여전히 좋아하지만, 그에 결코 지지 않는 전통주가 있음을 최근 깨닫고 있다. 더 열심히 살고, 더 열심히 운동해서 술과 음식을 좀 더 건강히 즐길 수 있도록 힘을 내 보아야겠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만큼 최대한 전통주를 더 알리고 좋은 사람들과 함께 잘 즐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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