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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렵채집일기/연애와 로맨스

여자랑 둘이 술 마시던 기억 - 신림역 근처

by FarEastReader 2017. 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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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날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술을 마셨다. 신기하게도 술집 안에서 토끼를 키우던 술집이었다. 신림역 근처의 술집이었다. 맥주 피처와 기본 안주를 시키고 취한 듯 웃고 웃는 취했다.

그 날 밖은 이미 어두웠고 손님은 각 구석탱이에 둘씩 셋씩 앉아서 이야기에 몰두하고 있었다. 자리에 앉자 대학교 동아리방처럼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오늘은 뭔가 있겠다 -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여자는 나보다 세살이 많았는데 별로 나이차이를 느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에게 나는 애기처럼 술 사달라고 해서 약속을 잡았다. 번번히 느끼는 거지만, 적어도 나는 연상의 여자에게 접근할 때 어리광을 피우는 게 제일 잘 먹히는 것 같다.

머 여튼. 그 여자는 동남아에서 오래 살다온 이른바 해외파라면 해외파였다. 살다 온 나라는 동남아에 있는 나라인데 풍겨나오는 간지는 씨바 무슨 유럽이나 미국에 살다온 사람이랑 비슷했다. 나는 그 여자에게 영어를 가르쳐 달라고 하면서 친해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어떠케 그런 식으로 해서 술 약속을 잡은 건지 신기하기만 하다. 그래도 머 죽은 잘 맞았다. 허름한 술집인데도 전혀 쪽팔리거나 불편하거나 이런게 없었다. 아마 이런 걸 보면 옛날이 더 좋았던 거 같기도 하다.


그 여자는 나에게 영어가 어렵냐고 물어서 나는 솔직히 어렵다고 했다. 그 여자는 한국어랑 영어를 섞어 쓰는게 세상에서 제일 쉬운 말인 거 같다는 말을 했다. 나는 그 여자에게 영어를 배워서 많이 는 거 같다고 아부했다. 그리고 술김에 외국어는 외국인 여친을 사귀면 제일 빨리 는다고 하는데 외국인 여친이나 찾아볼까 한다는 뻘소리를 했다. 그리고는 그 여자의 눈을 바라봤다.

그 때 그 여자가 가방 속에서 편지 하나를 꺼냈다. 으잉?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한테 주는 건가 했더니 알고 보니 그런 건 아니고 그녀가 다른 남자에게서 받은 것이었다. 봐도 되냐고 물어 보니 안된다고 했다. 뭔데요 좀 봐요 하니 자랑하고 싶어서 꺼낸 거라고 했다. 그리고는 노트를 꺼내고는 지 가방에서 펜을 꺼내서 나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 사람이 편지를 쓰는 동안 좀 기쁘면서도 지루해서 일부러 모르는 척 멀뚱멀뚱 주위를 둘러보고 토끼도 만지고 하다가, 슬쩍 그 여자가 처음 가방에서 꺼낸 편지를 살포시 열어서 앞부분만 살짝 보았다. 내가 보는 걸 뻔히 아는데도 내가 대놓고 본 건 아니어서 그런지 그 여자는 그냥 내버려 두었다.

'XX야
안녕 우리가 이렇게 만난 것도 벌써 1년이 되었지?' 하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편지였다. 그 이상은 잘 안보이고 술 때문에 문장이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고 해서 보지 않았는데, 그 여자가 봐도 된다고 하는 거였다. 그리고는 나에게 자기가 쓰던 편지를 주었다.

'XX (내이름)야 오늘 너랑 이야기 하는게 이렇게 재미있을지 몰랐어. 나 사실 만나는 사람이 있어 네가 지금 보고 있는 그 편지도 그 사람이 준 거야....'

나는 그 여자가 내게 그 술집에서 써서 준 편지만 읽고, 그 여자가 받은 편지는 읽지 않았다.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 지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다. 다만 지금 이 여자는 나를 좋아 하나부다 하는 확신만 들었다.

나는 편지 고맙다고 하고는 맥주 1리터 피처를 또 시켰다. 그리고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면서 하나를 다 비우고 또 시키고.. 이러다 보니 정말 완전히 취했던거다.

누나 사람이 왜그래요? 남친도 있는 사람이 여기서 저랑 있어도 돼요?

안돼지...

그쵸 그렇죠. 그런데 지금 몇시죠?

12시 넘었네..

이제 나가요.

나가서 우리는 가까운 신림역을 지나쳐서 한참 서울대 쪽으로 걸어갔다. 차는 끊겨서 택시 타야 하는 상황이었고 한참을 걸었는데 허름한 거리와 개천만 졸라게 길고 주변에 모텔 하나 안 보였다. 술이 다 깨는 거 같았다.

지나가던 택시를 잡아서 누나가 사는 동네로 같이 갔다. 다행히 방향이 같아서 그 여자를 내려 주고 나도 집에 가면 되는 거였다. 택시 안에서 나는 그 여자에게 물었다.

저 누나 혼자 산다고 했죠?

아니 언니랑 같이 사는데. 자취하는 거지 혼자 사는 건 아니고

오늘은 초등학생같이 굴지 말고 저랑 있어 주면 안돼요?

대답이 없었다.

택시가 그 여자 집 근처에 도착했을 때 나는 그녀와 같이 내렸다. 그리고 근처를 필사적으로 두리번 거리며 모텔이 있나 보았다. 운 좋게 하나 보여서 같이 가자고 했다.

그런데 너랑 나랑 이렇게 되면 우리 내일 못 볼 거 같아.

그런게 어딨어요

결국 같이 들어 갔다. 새벽 2시쯤이었다.

일이 끝나고서 씻고 같이 누워 있었다. 나는 내가 중고등학교 시절에 겪었던 안좋은 일을 이야기 했다. 누나는 듣기만 했다.

갈래요? 집에는 가야 할거 아녜요.

그래 가자..

나는 그 여자를 집 앞까지 데려다 주고 엄청나게 지친 채로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내내 지난 밤이 떠올라 정말 미칠 거 같았다. 정작 그 밤보다, 다음날의 회상이 야릇했다. 긴 갈색 다리가 계속 떠올랐다.

결론: 연상에게는 애교로 승부다

내 추억이 누군가에게 참고가 되면 좋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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